2021년 3월 21일 주일저녁예배 "어려울 때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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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더 4장 1-17절
-제목 : 어려울 때 기도하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이 일반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 되셔서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환란날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내 이해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고통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면 기도할 때에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에 어려운 시기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게 됩니다.
먼저 본문 1절입니다.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모르드개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고 입기에 참 불편한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심지어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 통독을 하며 울고 있는데 이유는 본문 3절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라고 합니다. 이 왕의 명령과 조서가 뭐냐면 에스더 3장 6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모르드개가 페르시아의 제 2인자로 선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아말렉 족속에게 절하지 않기로 결단한 모르드개의 행동이 유다 전체에 위기로 돌아옵니다.
영악한 하만은 온갖 술수로 아하수에로 왕을 구어 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에스더 3장 13절입니다.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제비뽑기로 정한 날에 모든 유다인이 다 죽게 될 상황입니다. 이 사실이 지금 페르시아 제국에 있는 온 유대인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1-3절을 보면 무수한 유대인들이 모르드개와 마찬가지로 애통하여 금식하고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망했다. 완전히 망했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라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저 애통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찾아오는 고난의 시기에 우리는 그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바로 원인을 찾고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난에는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거기에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속에 있습니다.
야구 좋아하시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프로야구 개막이 얼마 안남았습니다. 올 해 프로야구에서 큰 뉴스 하나가 있는데 메이저리거 추신수 선수가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한국예능 방송에도 종종 나오곤 했습니다. 예전에 우연히 TV를 보다가 추신수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인데 참 인상적인 모습이 하나 기억납니다.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자꾸 아이들이 나무가 영어로 뭐냐?, 토마토 발음 해봐라 하면서 부모를 놀리는 장면인데, 추신수 선수가 화내면서 한국말 안쓰면 밥 안준다 하는 장면입니다. 이미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벌써 발음부터 다릅니다.
따라서 미국에 교포로 사는 한국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1960년대 이후로 미국이민이 활발해졌습니다. 교포 1세대가 지나고 2세대, 3세대가 지나면서 보통 한국계 미국인이라 합니다. 그들을 보면 겉모습만 한국인이지 생각과 사고방식은 미국인처럼 살아갑니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니깐 자연스럽게 언어와 문화를 통해서 미국인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1992년도에 LA폭동 사건 기억이 나십니까? 문제의 발단은 로드니 킹 사건인데 흑인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가 불똥이 튀어서 결국 LA에 폭동이 일어나는데 애꿎은 한국인들이 큰 피해를 본 사건입니다. 그 때 교포들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미국인으로 살았지만 여전히 자신들은 한국인이구나!
다시 본문 3절로 돌아가봅시다.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왕의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많은 사람들이 조서의 내용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서 크게 애통하고 금식하고 울고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자포자기 하고 누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왜 그렇죠? 자신들이 곧 유다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을 생각을 해보면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한 때가 B.C 586년입니다. 그 이후로 유다백성들은 포로기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왕후에 자리에 오를 때가 B.C. 483년 경입니다. 계산해보면 바벨론 당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포로기의 삶이 100년이 넘었습니다.
여러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그들의 삶 가운데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지금 페르시아의 삶에 잘 정착하고 어느정도 안정을 취하며 잘 살아갔을 겁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나면 에스더의 말씀의 역사적 위치를 보면 잘 보입니다. 에스라를 기준으로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일이 에스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총 3차에 걸쳐 포로귀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에스라 6장까지가 1차 포로 귀한이 마무리 되고 에스라 7장부터 2차 포로귀한이 이뤄집니다. 즉, 에스더 말씀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1차 포로 귀한에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는 자들입니다.
아마도 포로기 삶을 살았어도 다양한 삶이 있었을 겁니다. 바벨론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가 바껴가면서 여러 기회들을 얻고 구하면서 어느 정도 삶의 만족을 누리며 살았을 유대인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원수 하만을 통해서 곧 죽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는 때 비로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유다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비탄에 빠진 겁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모르드개는 기도합니다. 사실 기도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기도 밖에 할 수 없는데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에스더 입니다.
그래서 다시 본문 1절을 봅시다.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페르시아 법에 따라 굵은 베 옷을 입고 성안으로는 못드러갑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대궐 문 앞에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이 소식이 에스더에게까지 알려집니다. 사실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이 죽임을 당하게 될 조서에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왕궁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모르드개가 통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제서야 반응합니다. 먼저는 모르드개에게 옷을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듣지 않고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 보니깐 "에스더가 왕의 어명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
자신이 신뢰하는 하닥이라는 내시를 통해 이제 모든 전후 사정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하닥에게 지금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은 일만달란트를 제시하여 아하수에로 왕을 구어 삶았고 그 사실이 담긴 조서를 에스더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에스더에게 너는 왕에게 나아가서 유다인을 위하여 간절하게 구하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스더는 믿음이 연약한 자와 성정이 비슷합니다. 믿음의 담대함도 없을 뿐더러 이어지는 것은 핑계입니다. 본문 11절 봅시다.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특징이 뭔 줄 아십니까? 3가지 특징을 꼽자면 첫째는 상황과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둘째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세번째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연약한 면이 오늘 본문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비교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네가 나서서 민족의 멸절을 막을 수 있도록 아하수에로 왕께 나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보입니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에스더의 답변을 보면 믿음의 연약한 특징이 다 드러납니다. 첫째 모르드개는 울부짖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으나 에스더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둘째 상황과 환경에 지배를 받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 합니다.
다시 본문 11절을 봅시다.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잘 보면 왕에게 나갈 때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맞습니다. 왕을 해하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왕의 안전을 위한 장치로 왕이 부르지 않고는 마음대로 왕께 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허락받지 않고 왕께 나아가는 것은 곧 죽는 길입니다.
또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미 왕후로 지낸지 5년이나 지났습니다. 그토록 사랑받았던 에스더 역시 한 달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합니다. 즉, 예전만큼 왕이 에스더를 아까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에스더는 자신의 환경과 상황을 보면 필경 죽겠다 싶은겁니다.그래서 모르드개에 말에 즉시 순종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이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지 못할 때 우리도 이러한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자꾸 상황에 매이고 환경에 매여서 담대하지 못합니다. 그 증거가 삶 속에 기도하는 시간이 점점 사라집니다. 기도가 사라질 때 곧 우리 믿음이 무너지는 때입니다.
에스더의 미지근한 반응 때문에 모르드개가 따끔하게 한 마디 합니다. 본문 13절-14절입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모르드개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에스더서 전체를 뒤져봐도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에스더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모르드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에스더에게 충고하는 겁니다. 에스더 네가 지금 왕궁에 있어 안전하다고 착각하지 말라! 또 만약에 에스더 네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본문 14절 서두를 보겠습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모르드개가 뭐라고 합니까? “다른데”라고 합니다. 네가 가만히 있으면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는다.즉, 의도적으로 감추인 듯 싶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입니다. 에스더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내실 겁니다. 모르드개가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심지어 본문 14절 후반부에 보면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에 자리를 얻은 것 그거 네 자격과 노력으로 된 것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다. 정신차리라고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 요구하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분명히 하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할 것인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불순종의 편에 설 것인가? 에스더는 두 갈래 길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에스더가 답할 차례입니다.
본문 15-16절 보겠습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의 답변은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왕께 나아가겠습니다. 혹 일이 잘못되어 죽으면 죽겠습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순종하기로 결단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 말씀하면 언제나 첫 번째로 떠오르는 말입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것 만큼 담대한 믿음의 고백은 없을 것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겠다. 참 멋진 믿음의 고백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결단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인삼 무역왕 임상옥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정조 3년에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쓰일 만큼 유명한 거상입니다. 특별히 중국에 우리나라 인삼과 홍삼을 팔면서 많은 돈을 벌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재벌 총수 정도의 부를 쌓았다고 합니다. 인품도 좋아서 자선사업도 많이 한 거상 임상옥이란 사람의 일대기 중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장사꾼의 삶을 살다가 잠시 큰 어려움에 빠져 스님으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추월암이란 곳에서 잠시 스님생활을 했는데 곧 다시 세상에 나가 장사꾼의 길을 걷게 됩니다. 거기서 자신의 멘토 석궁스님이 위기를 만날 때 보라고 편지 2장과 계영배라고 불리는 술잔 총 세가지의 선물을 줍니다.
그리고 다시 장사를 시작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한 번은 중국 베이징에 인삼을 납품하는데 중국 상인들이 단합을 하여 임상옥이 가져온 인삼을 아무도 안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헐값에 인삼을 넘기라고 협박도 받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뽀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궁스님이 위기 때 보라고 한 편지 한 통을 열어봅니다. 봤더니 무슨내용일까 기대하면서 봤는데 달랑 글자 하나입니다. 죽을 사, 죽을 사 한 글자만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죽으란 소리인가? 그렇게 죽을 사 글자 하나를 충분히 묵상하고 임상옥이 중국 상인들을 한 자리에 부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팔려고 내놓았던 인삼이 있었는데 갑자기 거기에 불을 붙여 태워버렸습니다. 중국상인들이 깜짝놀랍니다. 그러다가 몇 몇 상인들이 불이 붙은 인삼의 불을 끄면서 가격 단합 안하겠다. 얼마든지 부르는 가격에 인삼을 사겠다고 서로 날리를 쳤던 일화입니다.
죽을 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죽고자 할 때 살 길이 열린다는 겁니다. 오히려 아둥바둥 살려고 몸부림 치면 오히려 죽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설명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죽고자 하는 길에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엔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냐면 삶에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사명이 보이게 됩니다. 믿음의 사명은 어떻게 죽을까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로다 고백합니다. 죽고자 합니다. 다시 16절 잘 보면 모르드개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3일금식을 부탁하면서 자신도 3일 금식하고 왕에게 나가겠다는 결단입니다. 드디어 에스더가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믿음의 결단 합니다. 11절에 아하수에로 왕에게 부름 받은 지 이미 30일이나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럼 적어도 상식선에는 왕에게 나아갈려면 가장 최상의 컨디션과 미모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삼일을 금식하고 가겠다는 겁니다.
즉, 더이상 상황과 환경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또한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생각하는 사명자의 모습으로 에스더가 서게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장학금 수혜를 받는 장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을 살아갈 때 어떻게 살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죽을까 입니다.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기도하는 자만이 이러한 사명을 깨닫고 “죽으면 죽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근데 이 어려움 속에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내가 살고자 하는가 죽고자 하는가?
사명을 가지고 죽고자 할 때 비로소 진짜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창세기 4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이 정말 아끼던 요셉을 잃고 나서 이제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깁니다. 근데 문제는 7년 대흉년의 기간 야곱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애굽의 총리로 있던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오라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야곱이 결단합니다.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 고백이 결국 야곱 가족 전체가 살 길을 찾게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도 살고자 하지 않으시고 죽고자 하시니 결국엔 택한 백성들을 구원할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기도하시고 사명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 고민하며 진짜 생명 길을 걷는 성도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과 환경 속에 믿음을 도전 받는다 해도 기도 하면 길이 열릴 겁니다. 늘 깨어 기도하시고,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백성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